[퇴직 후 해외봉사] 골목마다 넘쳐나는 아이들 노는 모습이 부러웠다
한해의 절반이 싹둑 잘려 나갔다.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듯 365일이 금방 소진될 것 같은 기세다. 영어권에서는 시간이 빠르다는 표현으로 Time flies라는 말을 쓴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나 시간이 쏜살같다는 말과 상통하는 표현이다. 그들이나 우리나 세월이 빠르게 흐름을 체감하는 것은 같은 느낌인 모양이다.
늘 바쁘고 조급하게 생활하는데도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보면 괜히 조바심이 더 난다. 계획해 놓은 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흐르는 시간 앞에서 또다시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내 시간을 더 빨리 돌리는 듯하다. 더욱이 이곳 사람들하고 속도를 맞추기에는 참으로 버겁다. 바쁠 것도, 급할 것도 없는 이 나라 사람들을 보면 애통이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방인인 내가 맞춰 살아가야지. 이들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말에는 운동 삼아 내가 사는 동네를 한 바퀴 돈다. 이곳 사람들의 보폭과 눈높이에 맞춰 느린 걸음으로 서서히 산보하듯 돌면 2시간 정도 걸린다. 골목마다 아이들이 흙밭에 뒹굴고, 서로 엉켜 싸우며 여러 가지 놀이를 즐기는 모습이 정겹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내 어릴 적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저출산 고령화 대책으로 이민 확대, 근로자의 탄력적인 수용 등 변화 필요
출생률이 저조하고, 급속히 고령화되어 가는 우리나라의 실상을 생각하면 골목마다 넘쳐나는 아이들만 봐도 부러움이 앞선다. 곳곳에 아이들의 꿈이 영그는 이 나라의 장래가 밝아 보인다. 필리핀이 경제성장은 다소 더디지만, 2015년에 이미 인구가 1억 명을 넘어섰고, 2023년에는 1억 1,600만 명으로 세계에서 13번째로 많다. 인구 증가율은 매년 1.4%로 인구가 자꾸 줄어드는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마냥 부러울 뿐이다.
물론 인구증가의 이면에는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이 이혼 및 낙태를 법으로 철저히 금지하고 있는 영향이 크다. 하지만 이제 어느 나라나 인적자원은 곧 국력이 되었다. 필리핀 국민의 평균연령은 25.7세다. 세계화 시대에 급속한 정보화, 산업화로 이들이 세계를 장악할 날이 멀리 않은 것 같다. 최근 필리핀 정부에서는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육개혁을 통해 국가인재를 육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에게 동남아는 약속의 땅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와의 원만한 유대관계로 우리에게 아주 우호적이다. 미래학자들은 한국이 지금의 인구감소 추세라면 지구에서 가장 먼저 소멸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감소추세를 막지 못하는 실정이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인구를 늘릴 방법이 없다면 국경을 개방해야 한다. 난민을 수용하고 이민을 확대하는 한편, 외국인 근로자들을 적재적소에 탄력적으로 배치하여 국가의 동력을 살려 나가는 것이 급선무다.
이미 세계는 글로벌 사회가 됐다. 인재와 젊은 노동력을 확보하는 국가만이 성장을 담보할 수 있다. 각 나라의 젊은이들은 양질의 일자리와 살기 좋은 국가를 찾아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국제협력재단, 민간협력단체 등을 통해 국가 이미지를 신장시켜 왔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골목에서 내게 순박한 표정으로 전통인사 하는 아이 모습이 순박하다
이러저러한 생각에 빠져 마을 입구의 골목에 들어서는데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한 아이가 내게 다가와 필리핀 전통 인사인 마노를 한다. 필리핀에는 마노(ma no) 또는 빠그마마노(pagmamano)라는 인사법이 있다. 윗사람의 손을 오른손으로 잡고 고개를 숙이며 손등을 자신의 이마에 가볍게 대는 방식이다.
어르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축복을 기원하는 겸손한 몸짓이다. 오랜 세대를 이어오는 필리핀 전통의 인사법이다. 얼떨결에 받은 인사라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아이의 모습이 너무 순박하고 맑아 보였다.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손을 흔들어 줬다.
나는 가능하면 외국인 티를 안 내려고 해도 이곳 사람들은 금방 외국인임을 알아챈다. 그렇다고 내게 딱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닌데, 종종 이렇게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건네오는 사람들이 있다.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예전 같으면 외국인이라고 구경거리가 되고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텐데, 그만큼 외국인들과의 생활이 일상화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운동하는 코스 중 번잡하게 얽힌 마을의 골목길을 빠져나가면 군데군데 초원이 펼쳐진다. 상쾌하고 조용해 산책하기 좋은 코스다. 비가 오면 진창으로 변했다가 비가 개면 또 걷기 편한 흙길이 되는 구릉이다. 가축들의 방목지로 활용되지만, 놀이터로도 제격이어서 주말이면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다양한 놀이를 즐기는 곳이다.
한 길로 이어지는 골목 옆 언덕에는 이 마을에서는 제일 큰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다바오만의 푸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교회는 평화의 상징처럼 안온하고 포근하다. 교회 마당에서는 항상 청소년들이 농구나 배구 같은 운동을 즐긴다. 나는 잔디 위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구경한다.
적도의 뜨거운 복사열을 타고 사말섬 위로 뭉게구름이 솜사탕처럼 피어오른다. 물먹은 구름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먹구름이 되어 이내 비가 되어 대지로 쏟아진다. 시원한 스콜이다. 비를 맞아도 싫지 않다. 덕분에 산책 후 개운하게 샤워를 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미세먼지와 대기오염 때문에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더운 것만 빼면 일년내내 좋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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