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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춘분에 하지감자를 심었습니다

by 램 Ram 2025.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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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에는 3월 중순인데 뜬금없는 폭설이 내렸다.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는 옅은 눈이 들녘을 살얼음처럼 덮고 있었는데, 날이 밝아지면서 폭설로 변했다. 숙소 마당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밀던 산수유가 파르르 떨며 눈 속에 얼굴을 묻는 모양이 한없이 가여워 마음이 아팠다.


어지러운 세상, 꽃 없는 꽃 축제

지난 주말에 들렀던 광양 다압의 섬진강변 매화 군락지는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만개했을 꽃이 피지 않아 꽃 없는 축제를 치렀다.

 

어지러운 세상, 봄은 봄이로되 봄이 아니로다. 날씨라도 화창하고 꽃이라도 제때 피어 이 강산에 봄이 왔음을 알려주면 좋으련만,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건 사람이나 자연이나 매한가지다. 인위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을 어찌하겠는가?

 

조금 늦는다고 꽃이 안 피거나 봄이 못 오는 건 아닐 터, 인고의 시간이 훨씬 튼실한 봄을 영글게 할 것이란 걸 우리는 알기에 조바심 칠 일은 아니다.

 

오늘은 24절기 중 네 번째 절기인 춘분(春分)이다. 추분(秋分)과 더불어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날이다. 다행히 날씨는 풀려 삼라만상이 기지개를 켠다. 구례군 체류형농업창업지원센터 식구들도 봄을 맞아 분주하다. 지난주에 절단해 놓은 씨감자를 추운 날씨 때문에 심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을 D-day로 잡았다.


감자 파종에 여념이 없는 세대원들 ⓒ임경욱
감자 파종에 여념이 없는 세대원들 ⓒ임경욱


아이를 위해 농촌으로 유학 온 가족들

이곳 센터는 2017년에 문을 열어 올해를 9년째를 맞고 있다. 구례군에 정착을 희망하는 도시민을 위해 농업과 농촌을 몸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시설이다. 귀농·귀촌을 계획하고 있는 도시민들이 1년 동안 직접 살아보면서 적응기를 갖는 스프링캠프 같은 곳이다.

 

3월 초에 26세대가 입주해서 모두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어린아이들과 함께 농촌으로 유학을 온 세대가 2세대 있고, 부부 세대 다섯 가구, 나머지는 나처럼 단독 세대이다. 연령별로도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지만, 60대가 50% 이상이다.

 

특별하게도 여성이 남성보다 많다. 퇴직하고 자발적 독립을 위해 선택했단다. 각 세대마다 다양한 목적과 계획을 세우고 입주해 살지만, 센터 설립 취지에 맞게 농사를 익히고 배우며, 손수 농사를 짓는 것은 기본이다.

 

직장에 1년간 휴직을 하고 아이를 위해 이곳으로 왔다는 가족은 오직 아이의 앞날을 위해 이주해 온 것이다. 다른 가족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직장생활을 하는 아빠와는 주말부부로 살기로 하고 할머니와 함께 내려왔단다.

 

벌써 농촌 생활에 적응한 아이들은 통학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가며, 농촌 생활을 즐기고 있다. 도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여유와 풍요가 그들을 싱그럽게 만들어 간다.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미래가 푸른 솔처럼 건강해 보인다.


감자 파종 후 비닐 멀칭까지 끝냈습니다. ⓒ임경욱
감자 파종 후 비닐 멀칭까지 끝냈습니다. ⓒ임경욱


춘분에 심은 감자, 하지에 수확합니다

우리가 심게 될 감자는 주로 간식이나 조리용으로 많이 소비하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주식으로 소비하는 세계 4대 식량작물에 속한다. 구례에서 시설재배라는 감자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수확되기 때문에 고가에 팔려나가는 고소득 작물로 재배면적이 늘어나는 추세란다.

 

20여 명의 세대원들이 모여 미리 정지 작업을 마친 300여 평의 밭에 조를 편성해 감자 심기를 했다. 모두 초보 농사꾼이라 서툴고 더디지만, 열성적이다. 특히 농촌 정착을 목적으로 입주한 세대원들은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고, 작업에서도 다른 이들보다 열정을 갖고 한다.

 

두둑에 일정 간격과 깊이를 맞춰 감자를 심고, 비닐멀칭을 하는 것까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모두 열심히 도운 덕에 빨리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춘분에 심은 감자는 하지(夏至)를 전후해 수확할 수 있단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하지감자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파종 후 90100일 사이에 수확할 수 있으니, 생육기간이 짧은 속성작물이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에 배를 채워주던 고마운 작물이기도 했다. 오늘 심은 작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도 살을 찌워갈 것이다. 마음속에 낀 도시의 찌든 때를 깨끗이 씻어낸 후에 새살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다음 주에는 쌈채를 심어야 한다. 상추, 배추, 청경채, 케일 등 재배가 가능한 여러 가지 채소 모종을 구입해 심을 요량이다. 그것들이 자라면 우리들의 밥상은 더욱 알차고 풍성해질 것이다. 손수 기른 채소로 밥상을 차려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 본 기사는 2025. 3. 21.() 오마이뉴스(https://omn.kr/2coqf)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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