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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을사조약 120년, 매국노 을사오적은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by 램 Ram 2025.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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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을사년은 대한제국이 1905년에 일본과 체결한 을사조약 12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 해 을사조약에 관여한 을사오적이 있습니다. 한국은 1905년 을사조약에 찬성한 을사오적을 어떻게 처벌했을까요?


Ⅰ. 을사조약의 배경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은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든 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일본의 한국 침략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한국의 주권을 크게 침해한 사건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조약은 "2차 한일 협약" 또는 "을사보호조약"이라고도 불립니다.

 

1. 러일 전쟁(1904-1905)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일본은 전쟁 중에 이미 한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한일의정서(1904)를 체결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내정에 개입했습니다.

 

2. 국제 정세

당시 국제사회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특히,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일본은 이러한 국제적 분위기를 이용하여 한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려고 했습니다.


을사조약 문서 ⓒ위키백과
을사조약체결 기념사진 ⓒ나무위키

 


Ⅱ. 을사조약 체결 과정

1. 강압적 협상

190511, 일본은 한국 정부에 강압적으로 조약 체결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은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고, 고위 관료들을 협박했습니다. 일본의 특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국의 고종 황제와 정부 고위 인사들을 상대로 강압적인 협상을 벌였습니다.

 

2. 조약 체결

19051117, 일본의 강압에 못 이긴 한국 정부는 을사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은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고,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조약 체결 당시, 한국 정부 내부에서도 반대 의견이 강했지만, 일본의 강압으로 인해 결국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Ⅲ. 을사조약 주요 내용

1. 외교권 위임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고, 한국의 외교 사무를 일본이 대신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한국의 대외 관계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통감부 설치

한국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통감(統監)을 파견하여 한국의 내정을 간섭하도록 했습니다. 통감부는 한국의 행정, 군사, 외교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일본의 통제를 강화하는 기구로 기능했습니다.

 

3. 보호국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는 한국의 주권을 크게 제한하는 조치였습니다.


을사조약 문서 ⓒ위키백과
을사조약 문서 ⓒ위키백과


Ⅳ. 을사조약의 영향

1. 주권 침해

을사조약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듦으로써 한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했습니다. 이 조약은 한국의 독립을 크게 위협하는 사건으로 평가받습니다.

 

2. 항일 운동

을사조약 체결 후, 한국 내에서는 항일 운동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불리는 친일 매국노들에 대한 반감도 커졌습니다. 고종 황제는 조약의 불법성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3. 일본의 지배 강화

을사조약을 통해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를 더욱 강화했고, 이는 결국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이어져 한국의 완전한 식민지화로 귀결되었습니다.

 

을사조약은 한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사건으로, 일본의 한국 침략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강압적이고 불법적인 방식으로 체결되었으며, 한국의 독립을 크게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을사조약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암울한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과 항일 투쟁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Ⅴ. 을사조약에 찬성한 을사오적을 어떻게 처벌했나요?

을사오적(乙巳五賊)1905년 을사조약에 찬성한 다섯 명의 고위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이들은 일본의 강압에 굴복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을사조약에 서명함으로써, 국민들의 큰 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을사오적에 대한 처벌은 당시와 이후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1. 을사오적

을사오적은 다음과 같은 다섯 명의 고위 관료로 구성되었습니다:

 

이완용(李完用) :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 학부대신

이근택(李根澤) : 군부대신

이지용(李址鎔) : 내부대신

권중현(權重顯) : 농상공부대신


을사오적 ⓒ나무위키
을사오적 ⓒ나무위키

2. 국민의 분노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국민들은 큰 분노를 느꼈습니다. 을사오적은 매국노로 낙인찍혔고, 이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3. 고종 황제의 노력

고종 황제는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는 등 조약의 무효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4. 일본의 영향력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을사오적에 대한 처벌은 쉽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이들을 보호하며, 한국 정부가 이들을 처벌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5. 친일 행위 지속

을사오적은 일제 강점기 동안에도 친일 행위를 지속하며, 일본의 통치에 협력했습니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높은 지위와 특권을 누렸습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 정부는 일본의 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에, 을사오적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의 보호 하에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6. 친일파 청산 운동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에서는 친일파 청산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을사오적은 대표적인 친일파로 간주되어, 이들에 대한 처벌 요구가 다시 제기되었습니다.

 

1948, 대한민국 정부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설치하여 친일파를 조사하고 처벌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정치적 견제와 반발로 인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습니다.

 

을사오적 중 대부분은 해방 이전에 사망했거나, 해방 이후에도 처벌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지냈습니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서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입니다.


을사오적은 을사조약에 찬성한 대표적인 친일 매국노로, 한국 국민들의 큰 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과 보호 하에 처벌이 어려웠고, 해방 이후에도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실질적인 처벌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매국노로 기억되며, 한국 근현대사에서 친일파 청산의 어려움을 상징하는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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