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공화국 |
양성우 |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 쉬는 것을 보았는가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가라앉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부르면서
불끈불끈 주먹을 쥐고 으드득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껄껄걸 웃어대거나
웃다가 까무라쳐서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리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홧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 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은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은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 체하고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기울이며
뼈 가르는 채찍질을 견디어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
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 한 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
물려줄 것은 부끄러움뿐
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 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만 보고
한 마디도 깊은 말을 나누지 않고
번쩍이는 칼날을 감추어 두고
언 땅을 조심조심 스쳐가는구나
어디선가 일어서라 고함질러도
배고프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어지럽지만 머무를 곳이 없는 우리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들을 모질게 재갈 물려서
짓이기며 짓이기며 내리 모는 자는 누구인가
여보게 누구인가 등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 채찍 맞은 우리들의 슬픈 흉터를
바람아 동지섣달 모진 바람아 네 씁쓸한 칼끝으로도 지울 수 없다
돌아가야 할 것은 돌아가야 하네
담벼랑에 붙어 있는 농담거리도
바보 같은 라디오도 신문 잡지도
저녁이면 멍청하게 장단 맞추는 TV도
지금쯤은 정직해져서 한반도의 책상 끝에 놓여져야 하네
비겁한 것들은 사라져 가고
더러운 것들은 사라져 가고
마당에도 골목에도 산과 들에도
사랑하는 것들만 가득히 서서 가슴으로만 가슴으로만 이야기하고.
여보게 화약냄새 풍기는 겨울 벌판에
잡초라도 한 줌씩 돋아나야 할 걸세
이럴 때는 모두들 눈물을 닦고
한강도 무등산도 말하게 하고
산새들도 한 번쯤 말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이 만일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리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할 걸세
사랑하는 모국어로 부르짖으며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들이
언 땅에도 싱싱하게 피어나게 하고
논둑에도 밭둑에도 피어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몆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
온몸을 버둥거려야 하지 않는가 여보게
양성우의 시 ‘겨울 공화국’은 암울한 시대적 현실을 직시하며, 그 속에서 억압받는 민중의 고통과 절망, 그리고 변화와 저항의 의지를 담아낸 작품입니다.
이 시는 1970~80년대 한국의 군사독재와 민주화 운동의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며, 민중의 삶과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강렬한 시적 언어로 저항의 목소리를 드러냅니다.
Ⅰ. 시의 배경
‘겨울 공화국’은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을 형성한 군사정권 시절의 억압적 사회를 상징합니다. 겨울은 혹독한 현실과 민중의 고통을 상징하며, 차가움과 정적 속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공화국이라는 단어는 아이러니를 내포합니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강조하는 공화국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폭력적 억압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Ⅱ. 주제와 메시지
1. 민중의 고통과 억압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 쉬는 것을 보았는가"라는 구절은 억압 속에서도 끓어오르는 민중의 분노와 저항의 가능성을 상징합니다.
"군홧발로"는 군사 정권이 민중을 억누르는 폭력성을 고발하며, "허수아비", "노예"라는 표현은 민중의 무기력과 좌절을 드러냅니다.
2. 부끄러움과 자기반성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는 억압 속에서 침묵하며 현실에 순응하는 자신과 공동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입니다.
"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라는 표현은 미래 세대에 부끄러운 과거를 물려주는 현재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3. 저항과 변화의 의지
시의 후반부에서는 변화와 저항의 목소리가 더욱 강렬해집니다.
"잡초라도 한 줌씩 돋아나야 할 걸세"는 극한 상황에서도 희망과 생명력을 찾으려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사랑하는 모국어로 부르짖으며"라는 구절은 억압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희망과 저항의 목소리를 높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Ⅲ. 시적 구조와 언어
1. 대화체와 호소의 형식
"여보게"라는 반복적 호칭은 독자와의 친밀감을 형성하며, 공동체적 책임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대화체 형식은 시인의 절박한 호소와 연대의식을 강조합니다.
2. 강렬한 이미지와 비유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등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 등 폭력과 고통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며 억압의 현실을 생생히 전달합니다.
"진달래들이 언 땅에도 싱싱하게 피어나게 하고"는 민중의 저항과 희망을 상징하는 시적 이미지입니다.
3. 반복과 리듬감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쓰러지며 쓰러지며"와 같은 반복적 표현은 감정의 고조와 메시지의 강조를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4. 결론과 의의
겨울 공화국’은 억압적인 시대 속에서 민중의 고통과 분노, 그리고 저항의 가능성을 탐구한 작품입니다. 시인은 암울한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희망과 변화를 모색하려는 의지를 놓지 않습니다.
양성우는 이 시를 통해 침묵하고 순응하는 개인과 공동체를 비판하며, 정의와 자유를 위한 연대와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시대의 기록을 넘어, 어떤 형태로든 부당한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보편적 메시지를 전합니다.
Ⅳ. 시인의 삶과 문학
양성우(1949~) 시인은 한국 현대문학에서 민중의 삶과 사회적 현실을 강렬하게 담아낸 시인으로, 특히 1970~80년대 군사독재와 민주화 운동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 저항문학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의 작품은 억압과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시를 통해 사회적 불의를 고발하고 저항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 출생과 등단
시인은 1949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며 문학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1970년 〈한국문학〉에 시 ‘축제’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1970~80년대 군사독재 정권 아래에서 민중문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저항적 시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2. 시 세계와 특징
① 민중과 현실의 시인
양성우는 민중의 삶과 고통을 시의 중심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시대적 억압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그들의 저항과 연대를 강조합니다.
② 저항과 사회적 비판
양성우의 시는 사회적 불의와 권력의 폭력성을 고발하며, 침묵과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성찰을 촉구합니다. 현실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제시하려는 의지를 드러냅니다.
③ 강렬한 언어와 이미지
시인은 강렬한 비유와 이미지를 통해 억압적 현실과 민중의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반복적이고 운율감 있는 표현은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④ 역사와 시대정신
그의 시는 한국의 현대사를 반영하며, 역사적 사건과 민중의 고통을 시적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는 단순히 과거를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희망을 노래합니다.
3. 평가와 의의
시인은 억압과 불의에 맞서는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민중문학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시를 통해 시대적 책임을 다하는 시인의 역할을 실천하며, 문학이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대적 억압이 끝난 이후에도 민중의 삶과 현실을 시로 그려내며,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습니다.
양성우의 작품은 시대의 아픔을 기록한 동시에, 억압 속에서도 저항과 희망의 목소리를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열정을 보여줍니다. 그의 시는 단순한 문학적 가치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변화를 꿈꾸는 실천적 메시지로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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