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어요 |
한용운 |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는 자연 속에서 느끼는 미묘한 감정과 존재에 대한 의문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는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힘과 그에 대한 시인의 내면적 고찰을 표현하고 있으며, 나아가 일종의 존재의 근원과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자연을 통한 존재의 흔적 탐구
시의 첫 연에서는 바람도 없는데 떨어지는 오동잎, 장마 끝에 서쪽으로 몰려가는 구름과 푸른 하늘의 모습 등을 통해 무언가 보이지 않는 존재의 흔적을 감지하고자 합니다. 오동잎의 떨어짐이나 구름 사이로 잠깐씩 보이는 하늘이 "누구의 발자취"와 "누구의 얼굴"인지를 묻는 질문 속에서, 시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자연 현상을 통해 암시적으로 나타난다고 느낍니다.
2.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경외
두 번째 연에서는 오래된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향기, 그리고 돌뿌리를 울리며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냇물에서 알 수 없는 근원의 존재를 찾고 있습니다. 자연에서 느껴지는 감각적 요소들(향기, 물소리)을 통해 미묘한 존재감을 느끼고, 그 존재가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기에 경외감을 표현합니다. 이처럼 시인은 자연이 단순히 물리적 사물이 아닌, 존재의 근원과 연결된 무언가를 품고 있다고 느낍니다.
3. 신비한 존재와 시적 화자의 교감
세 번째 연에서 시인은 연꽃 같은 발꿈치, 옥 같은 손과 같은 이상적 이미지로 미지의 존재를 상상합니다. 그 존재가 하늘과 바다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세상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저녁노을을 보며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깃든 신비로운 존재와 교감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저녁노을은 시적 화자가 신비롭다고 느끼는 대상에 대한 존경과 동경의 감정이 투영된 상징물입니다.
4. 자신의 내면에 타오르는 그리움과 열망
마지막 연에서는 시인의 가슴속 열정과 그리움이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묘사됩니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는 표현은 끝없는 열망과 소멸되지 않는 사랑을 상징하며, 그 사랑이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인지에 대해 자문합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그로 인해 계속해서 타오르는 시인의 영혼과 헌신적인 마음을 드러냅니다.
5. ‘알 수 없음’에서 오는 깊은 성찰과 고독
시는 “알 수 없음”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시인이 자연에서 느끼는 경이와 존재의 신비를 표현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 근원이나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존재론적 고독과 성찰에 잠기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존재 탐구에 그치지 않고, 삶과 죽음, 사랑과 소멸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물음으로 확장됩니다.
‘알 수 없어요’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힘, 신비롭고 이해할 수 없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시인의 감수성을 보여줍니다. 만해 한용운은 이 시에서 자연을 통해 보이지 않는 존재와 교감하려 하고, 자신의 내면에 타오르는 열망과 그리움을 자연 속에 투영하면서 불교적이며 초월적인 깨달음의 순간을 담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히 자연을 묘사한 시가 아니라 우주의 근원, 생명의 신비, 존재의 의미에 대한 깊은 탐구와 성찰을 담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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