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는 1970년대 한국의 암울한 정치 상황, 특히 군사 독재와 억압적인 정권 하에서의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과 열망을 강렬하고도 비장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 시는 단순히 개인의 감정을 넘어, 민주주의를 위해 고통받고 희생한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민중의 고난과 투쟁을 기록한 역사적 상징으로 읽힙니다.
Ⅰ.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1.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시인은 "민주주의"를 단순한 정치 체제가 아니라, 억압 속에서도 지울 수 없는 이상(理想)으로 표현합니다. "타는 목마름"이라는 반복적 이미지와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는 구절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억압과 감시 속에서도 끊임없이 살아있음을 상징합니다.
이 "목마름"은 단순한 갈증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관통하는 깊은 갈망과 희생을 내포합니다.
2. 억압과 고통의 현실
시 속 "뒷골목", "발자욱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비명 소리", "신음 소리" 등의 이미지는 당시 사회가 겪었던 정치적 폭력과 고문, 검열, 억압을 생생히 묘사합니다.
민주주의를 외치다가 끌려가 고통받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은 희생자들의 아픔을 환기시키며, 이들이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위해 희생했음을 상기시킵니다.
3. 민주주의의 이상과 희망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이라는 표현은 민주주의가 억압받는 현실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희망으로 빛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이상이 아니라, 민중의 열망과 미래를 향한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4. 저항과 기록의 의지
시인은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며 자신의 글쓰기를 저항의 행위로 표현합니다.
"서툰 솜씨"라는 묘사는 고난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민주주의의 이름을 기록하려는 의지를 상징합니다. 이는 억압을 뚫고라도 진실과 이상을 남기려는 민중의 결의를 대변합니다.
5. 반복적 구조와 절규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구절의 반복은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목소리를 형상화합니다. 마지막 "민주주의여 만세"는 시인의 외침이자, 역설적으로 그만큼 민주주의가 부재한 현실을 강조하며,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단순한 시가 아니라, 시대의 고통과 열망을 담은 강력한 선언입니다. 억압된 상황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민주주의의 이상, 그리고 이를 위해 싸워온 사람들의 희생이 이 시를 통해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는 시인의 의지가 엿보입니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기고, 이를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과 행동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Ⅱ. 작가의 삶과 문학
김지하(1941~2022)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사회운동가로, 20세기 후반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문학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그는 군사 독재와 억압적 정권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을 옹호하는 목소리를 문학과 행동으로 표현하며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1. 생애와 배경
김지하의 본명은 김영일이며, 1941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습니다. 필명인 "지하"는 '땅속의 저항적 에너지'를 상징하며, 억압받는 민중과 지하에서의 저항을 뜻합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재학 중이던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며, 동시에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는 행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2. 문학 활동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五賊)’, ‘금관의 예수’ 등은 김지하를 상징하는 대표작들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정치적 메시지와 함께, 고통받는 민중의 삶과 희망을 강렬한 이미지와 상징으로 표현했습니다.
‘오적’은 당시의 부정부패와 독재를 신랄하게 비판한 시로, 정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고 김지하 본인은 체포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민주화 운동
김지하는 1970~80년대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며, 문학적 저항뿐만 아니라 행동가로서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특히, 1974년 인혁당 사건 당시 ‘양심선언’을 통해 사법 살인과 정권의 억압적 폭력을 고발했습니다.
그는 수차례 체포와 투옥을 겪었으며, 고문과 감시 속에서도 문학적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4. 전환점과 논란
1990년대 이후, 김지하는 정치적 입장을 바꾸어 과거의 민주화 동지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과거의 운동권을 비판하며, 문명과 생태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상을 제안했습니다.
이러한 입장 변화로 인해 일부에서는 논란이 있었으나, 그의 예술적 업적과 민주화 운동에서의 기여는 여전히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5. 말년과 유산
김지하는 자연과 생태 중심의 철학을 탐구하며, 문명 비판과 생명 운동에 주력했습니다. 2022년 5월, 강원도 원주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사망은 한국 문학과 민주화 운동에 큰 상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6. 평가와 의의
김지하는 시와 행동으로 독재에 맞서 싸우며,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을 대변한 "시인의 양심"으로 불립니다. 그의 시는 단순히 문학적 아름다움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고난과 저항, 그리고 희망을 담아내며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김지하는 자신의 삶과 문학을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와 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인물로, 그의 작품은 지금도 자유와 정의를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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