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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시(詩, Poem)

[명시감상] 정지용의 「향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by 램 Ram 2025.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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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네이버이미지
ⓒ네이버이미지


 

정지용의 「향수(鄕愁)」한국 근대 서정시의 정수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이 시는 단순히 '고향'을 그리워하는 차원을 넘어서, 잃어버린 이상향, 자연과 인간의 조화, 정서적 뿌리를 되찾으려는 시인의 내면세계를 풍부하게 담아냅니다.

 

 

 


1. 시 전체의 구조와 주제

시인은 5연의 구성을 통해 각기 다른 고향의 단면을 보여주며, 고향을 단순한 공간이 아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정서적 근원지로 형상화합니다. 각 연은 다음과 같은 테마를 가집니다.

 

- 1연 : 고향의 자연 풍경 ― 평화로움, 목가적 아름다움

- 2연 : 가족(아버지)의 모습 ― 따뜻함, 조용한 정감

- 3연 : 유년기 감정 ― 순수, 상실의 아픔

- 4연 : 가족(어머니와 누이) ― 소박한 삶, 여성적 따뜻함

- 5연 : 고향의 밤 ― 정서적 귀속감, 그리움의 완성

 

각 연은 후렴구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를 통해 반복되는 회상의 정서를 강화하고, 시 전체를 하나의 정서로 통일시킵니다.


출판 달곰미디어
출판 달곰미디어

 


2. 세부적인 해설

(1연)

"넓은 벌 동쪽 끝으로...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넓은 벌판과 실개천, 얼룩백이 황소는 자연 친화적인 고향의 원형적 이미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은 시적 감각이 뛰어난 구절로, 황소의 울음에 시간의 느림과 자연의 풍요로움이 담김

- “지줄대는”은 방언적인 표현으로 고향 특유의 운율과 말맛을 살림

 

(2연)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일상의 조용한 밤, 아버지의 모습은 시간의 흐름과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함

- “질화로”, “짚벼개” 등은 과거 농촌 생활의 구체적 사물로, 고향의 현실감을 더함

- “뷔인 밭”, “밤바람 소리”는 외로움과 쓸쓸함의 정조를 암시

 

(3연)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 화자의 정체성과 근원이 흙(고향)에서 나왔음을 표현

- “활살을 찾으려”는 대목은 잃어버린 이상 또는 잃은 자아를 찾으려는 몸부림

- “함추름 휘적시든”은 감정적 동요와 삶의 복잡한 내면을 나타냄

 

(4연)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이삭 줏던 곳,"

- “어린 누이”, “안해(아내)”는 고향에서의 가족적 기억과 여성성의 상징

- 검은 머리, 발벗은 모습은 소박하지만 강인한 여성상을 나타냄

- “따가운 햇살을 등에지고”는 농촌의 고단한 노동과 삶의 진실함이 드러남

 

(5연)

"하늘에는 석근 별... 도란 도란거리는 곳,"

- “석근 별”, “모래성”은 고향의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이미지

- “서리 까마귀”, “초라한 집웅”은 현실의 쓸쓸함과 따뜻한 기억이 공존

- “도란 도란거리는 곳”에서 공동체적 온기와 인간적인 정서가 절정에 다다름


충북 옥천 정지용 시비 ⓒ네이버이미지
충북 옥천 정지용 시비 ⓒ네이버이미지


3. 문학적 장치와 언어적 특징

- 방언과 고유어 사용 : ‘지줄대는’, ‘짚벼개’, ‘집웅’, ‘안해’ 등은 지역어를 통해 고향의 언어적 질감을 살림

- 감각적 이미지 : 시각(별, 황소), 청각(울음, 바람소리), 촉각(햇살, 이슬)이 오감을 자극

- 반복과 운율 : 후렴구는 노래처럼 시를 기억에 각인시키며 전통 민요적 정서를 부여


4. 시에 대한 논평

정지용의 「향수」는 흔한 노스탤지어를 넘어, 한국인의 정신적 고향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모더니즘 시인으로서의 실험성과 전통적 서정시의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며, 개인의 고향이 민족의 고향으로 확장되는 시적 보편성을 획득합니다.

 

현대화, 도시화 속에서 점점 잊혀가는 고향의 이미지를 시인은 마치 유리병 속의 추억처럼 정교하게 담아냅니다.

이 시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마음속 고향"을 떠올리게 만드는 감성적 힘을 갖고 있습니다.


충북 옥천 정지용 문학관 ⓒ네이버이미지


5. 정지용 시인의 삶과 문학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은 한국 근대시의 선구자로, 탁월한 언어 감각과 감성적인 서정미로 한국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시인입니다. 그의 삶과 문학은 근대와 전통, 민족과 개인, 감성과 지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1) 생애

- 출생 : 1902년 충청북도 옥천 출생

- 학력 :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 동지사대학에서 영문학 전공

- 직업 : 시인, 번역가, 교육자(휘문고보 교사 등 역임)

- 사망 :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실종

 

그의 납북 이후 오랜 기간 작품 활동이 금지되었지만, 1988년 복권되며 본격적으로 문학사에서 조명받기 시작했습니다.

 

(2) 문학 세계의 특징

① 모더니즘의 정착자

- 한국에 모더니즘을 정착시킨 대표 시인으로, 형식과 언어 실험에 적극적

- 초기에는 감각적 이미지서구적 감성을 바탕으로 한 세련된 도시적 서정시를 시도

- 대표작 : 「카페 프란스」, 「바다」, 「유리창」 등

 

② 전통적 서정성과 향토성

-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전통 정서, 자연, 고향, 민족 정체성을 강조한 작품들이 주를 이룸

- 시어에 한글 고유어방언,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적극 활용

- 대표작 : 「향수」, 「백록담」, 「오월」 등

 

③ 시와 종교, 철학적 사유

- 천주교 신자로서 종교적 심상과 내면적 성찰이 시에 자주 나타남

- 인간 존재, 고통, 구원 등의 주제에 대한 깊은 고뇌가 배어 있음

- 대표작 : 「십자가」, 「고향」, 「유리창」 등

 

(3) 대표 작품

- 향수 : 고향에 대한 강렬한 회상과 애틋한 감성, 한국적 정서의 정수

- 유리창 : 병든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몽환적으로 형상화한 걸작

- 카페 프란스 : 세련된 도시 감각과 자유로운 정서가 담긴 초기 모더니즘 시

- 십자가 : 신앙과 존재적 고뇌가 겹쳐진 종교시로, 실존적 깊이를 지님

 

(4) 문학사적 의의

- 한국 현대시의 틀을 마련한 개척자

- 서정시의 모범을 세운 시인으로 평가

- 한국어의 음악성과 조형미를 극대화한 시어 구사 능력

 

(5) 후대에 미친 영향

- 정지용의 시는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등 서정시 대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침

- 1980년대 이후 재조명되며 현대 한국 시문학 교육의 필수 텍스트가 됨


그는 언어를 조형하는 장인(匠人)이었고, 감정을 음악처럼 울리게 하는 서정시의 거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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