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site-verification: navera4e49777b03aa60823211a65b5d967a9.html 김용택 〈섬진강 15〉 – 겨울, 사랑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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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시(詩, Poem)

김용택 〈섬진강 15〉 – 겨울, 사랑의 편지

by 램 Ram 2026.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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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15

겨울, 사랑의 편지

김용택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 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달빛 산빛을 머금으며

서리 낀 풀잎들을 스치며

강물에 이르면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 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땅을 향한 겨울 풀들의

몸 다 뉘인 이 그리움

당신,

아,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네이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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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의 시 섬진강 15겨울이라는 계절의 물성과 농촌의 삶, 그리고 사랑의 윤리를 한 호흡으로 엮어낸 시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자연 서정시가 아니라, 살아 있음과 사랑이 어떻게 견뎌지고 유지되는가에 대한 조용하지만 깊은 성찰로 읽힙니다.


1. 공간 인식 :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시의 첫 연은 섬진강 주변의 마을을 묘사하지만, 그 묘사는 극히 절제되어 있습니다.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여기서 그만그만하게”, “가만히라는 표현은 자연과 인간 삶의 규모를 낮추는 언어입니다. 이 공간에는 웅장함도, 발전의 욕망도 없습니다. 대신 오래 머무는 삶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가난은 비극이나 결핍으로 강조되지 않습니다. 김용택에게 가난은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삶의 조건이며, 자연과 함께 오래 사는 방식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 첫 연에서 시인은 이미 독자를 느리게 살아야만 보이는 세계로 초대합니다.


ⓒ네이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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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육체와 진실 :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두 번째 연은 시 전체의 핵심 사유가 응축된 부분입니다.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 보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얼어 있음이 죽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보릿잎은 살아 있기에 얼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이 구절은 이 시의 윤리이자 철학입니다.

김용택은 말합니다.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존재만이 진짜 따뜻하다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받지 않는 사랑, 얼지 않는 사랑은 애초에 따뜻한 피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네이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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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연의 감각화 : “살 땅김의 잔잔한 끌림”

세 번째 연에서는 시적 감각이 극도로 섬세해집니다.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 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살 땅김은 피부가 땅기는 듯한 추위를 가리키는 토속적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자연의 추위가 곧 몸의 감각으로 스며드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합니다. 여기에는 자연을 바라보는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없습니다. 인간의 몸은 이미 자연의 일부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네이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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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랑의 은유 : 겨울 풀과 ‘당신’

마지막 연에서 시는 자연 묘사에서 사랑의 고백으로 넘어갑니다.

 

땅을 향한 겨울 풀들의

몸 다 뉘인 이 그리움

 

겨울 풀은 서서 버티지 않습니다. 땅에 몸을 눕히고, 낮추고, 견딥니다. 이 자세는 김용택이 말하는 사랑의 형식입니다. 지배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고, 그저 함께 견디는 사랑.

 

당신,

아,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특정한 연인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있으며, 섬진강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 맑은 피로 어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시인은 상처받고 얼 수 있는 존재, 그러나 끝내 녹아 사랑으로 남는 존재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네이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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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종합 비평 : 김용택 시의 미학

섬진강 15는 다음과 같은 미학적 특징을 지닙니다.

 

- 낮은 시선의 미학 : 작고, 가난하고, 조용한 것들에 대한 존중

- 계절의 윤리화 : 겨울은 시련이 아니라 진실을 가려내는 시간

- 사랑의 비영웅성 : 불타오르지 않고, 눕고, 얼고, 견디는 사랑

 

이 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얼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땅을 향해 몸을 낮출 수 있는가

 

김용택의 사랑은 선언이 아니라 자연처럼 오래 지속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읽을수록 조용히, 그러나 깊게 우리를 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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