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스의 노래 |
| 이창동 |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아네스의 노래」는 이창동 감독이 만든 영화 《시》에 나오는 시(詩)로 이창동 감독이 직접 썼다는 시(詩)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문정희 배우 가 낭송하며 오버랩되어 가는 장면이 우리에게 시(詩)가 왜 필요한지를 말해주고 있다.
1. 작품 맥락과 시의 위치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2010)는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이 고통과 죄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말하고, 침묵하며, 끝내 응답할 수 있는가를 묻는 작품입니다.
「아네스의 노래」는 영화의 중심부에서, 주인공 미자가 끝내 도달하고자 했던 언어이자 윤리적 응답입니다. 이 시는 단순한 삽입시가 아니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적 결론이며, 미자가 세계를 향해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시의 정서와 이미지
(1)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시의 시작은 죽은 자를 향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후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도달할 수 없는 존재를 향한 간절한 부름입니다. ‘적막’은 죽음의 공간이자, 살아 있는 자가 끝내 메우지 못한 윤리적 공백을 상징합니다.
(2) 자연의 이미지 — 노을, 새, 장미, 풀잎
이 시에서 자연은 위안이자 증언자입니다.
- 노을은 하루의 끝, 생의 저녁
- 새들의 노래는 계속되는 삶
- 시드는 장미는 시간과 유한성
-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은 가장 낮고 미미한 존재의 연민
특히 풀잎과 작은 발자국은, 영화 속에서 외면당한 약자와 희생자, 즉 말하지 못하고 사라진 존재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3)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 하지 못한 고백”
이 대목은 영화 전체의 핵심입니다.
미자는 끝내 “말하지 못한 것들” 앞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이 시는 사과이자 고백이며, 동시에 늦은 애도입니다. 시는 말할 수 없었던 진실을 대신 말해주는 마지막 언어가 됩니다.

3. 윤리와 시의 문제
이창동 감독은 이 시를 통해 시의 미학보다 윤리를 먼저 묻습니다.
이 시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장식이 아니라 속죄의 형식입니다.
❶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 이는 위로가 아니라 부끄러움의 표현입니다.
❷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 당신이 알아주기를”
→ 이는 사랑의 고백이자, 동시에 사랑하지 못했던 죄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시는 독자(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정말 보았는가?
정말 사랑했는가?
아니면 외면했는가?
4. 조용히 무너지는 시
「아네스의 노래」는 읽을수록 목소리가 낮아지는 시입니다.
울부짖지 않고, 항변하지 않으며, 끝내 축복으로 말을 닫습니다.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이 대목에서 화자는 이미 이별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절망이 아니라, 희망조차 초월한 기도로 나아갑니다.
마지막 연의
“머리맡에 선 당신을 / 만날 수 있기를…”
은 사후의 재회라기보다, 진실 앞에서 다시 마주하고 싶다는 소망, 즉 끝내 외면하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느껴집니다.

5. 맺음말
「아네스의 노래」는 잘 쓴 시이기 이전에, 침묵해야 했던 세계를 대신 울어주는 시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이 시를 통해 말합니다.
시는 아름답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에 존재한다고.
그래서 이 시는 읽고 나면 위로보다 부끄러움, 감동보다 긴 침묵을 남깁니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묻게 됩니다. “나는 과연 누구의 노래를 끝내 듣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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